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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코시사의 계절글 2021. 4. 26. 16:09728x90
얼마 전에 이유 없이 울적한 기분을 안고 외출했다 집으로 들어왔더니 신발 뒤꿈치 부분에 꽃같이 생긴 무언가가 하나 달려있었어요. 벚꽃의 꽃받침이었는데 이날 그걸 꽃받침이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나무에서 떨어지다 우연히 신발에 붙어 함께 집까지 온 작은 봄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울적한 기분은 금세 사라졌답니다. 벚꽃이 진 뒤의 길바닥엔 벚꽃 받침으로 가득했어요. 수없이 떨어진 꽃받침을 보고 벚꽃은 지고 나서도 잊을 수 없도록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지요. 벚꽃의 꽃받침이 체리 꼭지를 닮았다는 걸 아세요? 신발에 붙어있던 꽃받침을 방으로 가져와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체리 꼭지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체리 꼭지를 생각하니 작년 이맘때쯤 코시사가 틔웠던 가짜 체리와 진짜 체리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웃기게도 당연히 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꽃받침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은 진짜 체리와 가짜 체리의 차이를 알았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어요. 다들 알 법한 지식인데도 저는 몰랐고 그것을 제게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재미있어요.
또 얼마 전에는 저녁에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밖에 나갔다가 공기의 달콤한 냄새를 맡고 그대로 멈춰서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던 적이 있어요. 공기 냄새가 이렇게 달콤할 수가 있나? 놀라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노을빛에 물든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어요. 그러다 어떤 냄새와 비슷한지 깨달았어요. 아이스티를 마시려고 가루가 든 포장지를 뜯었을 때 모래바람처럼 아이스티 가루가 코앞에서 흩날린 적이 있나요? 그때 맡았던 냄새와 비슷했어요.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누가 공기 중에 아이스티 가루를 탄 것만 같았지요. 마침 저녁 하늘이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복숭아 아이스티 같은 공기 냄새'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사계절 내내 언제 읽어도 좋지만 봄과 여름이 코시사의 계절이듯(가을호와 겨울호도 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코시사는 봄과 여름이기에...), 저는 봄과 여름을 아이스티의 계절이라고 불러요. 집에서 아이스티를 마실 때면 종종 빨리 마시고 싶은 생각에 가루와 물이 잘 섞이도록 충분히 젓지 않아 빨대로 들이켰을 때 뭉쳐진 가루의 텁텁함과 단맛에 놀라곤 해요. 그러면 다시 천천히 빨대로 휘휘 젓고 들이켜 아이스티의 달콤한 맛을 즐겨요. 코시사 메일 알림이 오면 바로 메일을 열어 읽고는 작가님의 언어에 놀라 기침하듯 반사적으로 스크롤을 올렸다가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그 글자들에 감겼던 때가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코시사는 신발 위의 작은 꽃받침 하나와 달콤한 공기 냄새처럼 어느 평범한 날에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선물이었어요. 가끔씩 코시사에 bgm으로 첨부되었던 노래를 들으면 쌓였던 눈이 사르르 녹듯이 코시사를 읽던 작년의 봄과 여름으로 돌아가요. 매주 코시사 메일이 오는 날은 제게 레즈비언 축제 같은 느낌이었어요. 메일을 받은 날이면 늦은 새벽까지 레즈비언들은 관련 에피소드나 메일 감상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타임라인 가득 피웠지요. 트위터 특성상 나와 친구가 아닌 사람들의 트윗까지 자유롭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동네 이곳저곳에서 온 레즈비언들이 한 장소에 모여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정말 레즈비언 축제 같은 풍경과 분위기였어요. 그때가 그립네요... 약 1년 전에 메일 속에서 읽었던 정갈한 글자들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며 부드럽게 저를 신세계로 인도했고 그 세계에 살고 있는 현재까지도 제 삶에서 소소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요. 지금까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료수를 보고 웃게 된다거나, 이전에는 별로 먹어보지도 못했던 과일을 좋아하게 되어 마트에 갈 때마다 눈길이 간다거나, 따뜻하면서도 재미있고 깊은 울림을 주었던 이민경 작가님의 언어가 종종 떠오르곤 한답니다. 코시사를 읽었던 계절이 돌아오니 더 자주 떠오르는 것 같네요. 문득 코시사 단행본이 코시사 메일링을 진행했던 4~7월에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른 단행본으로 다시 마주하길 바라며 오늘은 오랜만에 코시사 메일함을 다시 열어봐야겠네요. 버석한 삶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준 이민경 작가님께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을 축하하며 글을 마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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