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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글 2021. 7. 29. 01:33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과일이 뭐야? 하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세 가지 정도의 후보에 자두는 늘 없었다. 그 후보들은 좋아졌다가 별로 안 좋아하게 되기도 하고 1순위에서는 밀려났지만 여전히 같은 질문을 들으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과일이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 변화 속에서도 자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자두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언제부터 자두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같은 이름의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를 좋아하면서부터였나. 아니면 비슷한 시기에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맛난 자두를 얻어먹었던 것 때문인가. 명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꾸준히 해오던 것들은 그 시작 시기가 불명확하기 마련이니 이것도 느슨하게 오랫동안 좋아해 온 과일이라 그런가 생각했다. 어릴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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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코시사의 계절글 2021. 4. 26. 16:09
얼마 전에 이유 없이 울적한 기분을 안고 외출했다 집으로 들어왔더니 신발 뒤꿈치 부분에 꽃같이 생긴 무언가가 하나 달려있었어요. 벚꽃의 꽃받침이었는데 이날 그걸 꽃받침이라고 부른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어요. 나무에서 떨어지다 우연히 신발에 붙어 함께 집까지 온 작은 봄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 울적한 기분은 금세 사라졌답니다. 벚꽃이 진 뒤의 길바닥엔 벚꽃 받침으로 가득했어요. 수없이 떨어진 꽃받침을 보고 벚꽃은 지고 나서도 잊을 수 없도록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지요. 벚꽃의 꽃받침이 체리 꼭지를 닮았다는 걸 아세요? 신발에 붙어있던 꽃받침을 방으로 가져와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체리 꼭지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체리 꼭지를 생각하니 작년 이맘때쯤 코시사가 틔웠던 가짜 체리와 진짜 체리 이야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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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지출하지 않았어도 되는 돈의 액수를 구하시오.글 2020. 11. 18. 06:03
오늘 정혈통 약을 먹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생 먹는 정혈통 약은 몇 알일까?' 다큐 피의 연대기에서 여성들이 평생 정혈을 하면서 흘리는 피의 양이 약 10L라고 했는데, 이제껏 우리가 흘리는 피의 양만 생각하고 먹는 진통제의 양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정혈통이 없거나 약을 먹을 정도로 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겠지만 나는 예전부터 쭉 정혈통이 심했기 때문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대충 계산을 해봤다. 일단 나는 보통 정혈 3일차까지 정혈통이 있고 운 나쁘면 4일차까지, 운 좋으면 2일차에서 끝난다. 1-2일차에 2알씩 2-3번 먹으니까 하루 4알씩이라고 치고, 3-4일차에는 하루 2알씩 한번 먹는다. 근데 대부분 4일차까지 아픈 일은 잘 없어서 3일차까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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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드러내면서도 감추고 살았다.글 2020. 7. 1. 03:51
나는 나를 드러내면서도 감추고 살았다. 기장이 짧거나 어깨가 파인 옷을 입으며 불필요한 신체 노출을 했다. 동시에 컨실러, 립스틱 등으로 나의 진짜 모습을 감추었다. 이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을까? 이것의 답을 알지만 굳이 적고 싶지 않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를 드러낸 것이 아니라 '나의 신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신체는 나만의 것이 아닌 공공재였다. 사회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정신 차려 보니 나의 몸은 공공재로서 남의 눈요깃거리가 되거나 평가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남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기도 했다. 나는 이런 취급을 원하지 않았다. 애초에 꾸밈도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틀에 맞추려고 했다. 대부분의 여자가 들어가게 되는 '꽃 모양 틀'이 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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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 Write] 2주 글감 7회차 '축제'글 2020. 5. 11. 21:01
자동차가 도로 위에서 미끄러지며 시끄러운 마찰음이 들려왔다. 그 날카로운 소리는 꼭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지면서 다른 차와 충돌하고, 그 차가 또 다른 인접한 차와 충돌하고. 도미노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이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날카롭고 차갑기만 한 이 소리가, 어째서인지 안 좋게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불꽃을 뿜으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여자는 아무 표정 없이 멀리 떨어진 다리 위에서 난간에 두 팔을 올려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몇 대의 소방차와 구급차, 경찰차가 도착했다. 곧이어 취재하러 온 기자들도 도착했다. 곳곳의 이글거리는 불길 속에서 바삐 움직이며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 그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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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 Write] 2주 글감 3회차 '문'글 2020. 5. 11. 20:59
몇 년 전 어떤 스릴러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이 사이코패스 남편에게 감금 당하게 된다. 그러나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감금과는 다르게, 문을 잠그지 않는다. 주인공은 몇 번의 탈출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언제든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다가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작전을 짜고 몇 차례 더 시도한 끝에 결국 남편에게서, 그 방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페미니스트로서의 각성에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성의 첫 단계는 내가 좁은 방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느냐 마느냐, 혹은 뒤로 다시 돌아가느냐의 선택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가 빨간약을 먹고 각성하긴 했지만 아직 코르셋을 버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