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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d Write] 2주 글감 3회차 '문'글 2020. 5. 11. 20:59728x90
출처: unsplash 몇 년 전 어떤 스릴러 소설을 읽었다. 주인공이 사이코패스 남편에게 감금 당하게 된다. 그러나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감금과는 다르게, 문을 잠그지 않는다. 주인공은 몇 번의 탈출 시도를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래서 그 이후로 언제든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다가 계속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작전을 짜고 몇 차례 더 시도한 끝에 결국 남편에게서, 그 방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페미니스트로서의 각성에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성의 첫 단계는 내가 좁은 방 안에 갇혀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느냐 마느냐, 혹은 뒤로 다시 돌아가느냐의 선택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내가 빨간약을 먹고 각성하긴 했지만 아직 코르셋을 버리지 못했을 때. 나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긴 했지만 타인에게 그런 나를 드러내기 두려웠을 때. 나는 그 단계에 머물러 있던 때가 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방 안에 스스로 갇혀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탈코르셋'이라는 운동을 알고 있고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갇혀있던 방 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나 자신의 해방을 되찾음과 동시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나가려고 시도했었다. 미투를 조롱하고 군대 가는 남성들이 불쌍하다던 친구에게 옳은 말을 몇마디 했을 뿐인데 대놓고 비아냥대는 표정과 어조로 "너 페미니스트야?"라고 묻던 그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사실 겁이 났다. 그 한 사람의 찌푸린 인상과 탁한 눈빛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 뒤로 꾸준히 여성 혐오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머리를 짧게 자를 예정이라고 말하는 등 내가 점점 문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이미 문 바로 앞에 와있었고,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문을 열고 나오니 내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걱정과는 달리 나를 반겨주는, 나와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뭔가 좋으면서도 이상했다. 방 안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알록달록했지만 모두 똑같았는데. 바깥에서 나를 반겨준 사람들은 알록달록보다는 무채색에 가까웠지만, 모두 다 달랐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인형이 아니라 이제야 진짜 사람을 만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진정한 나를 마주했다.
그 방의 문은 열 수 있지만 열 수 없는 문이 아니라, 내가 방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가고자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열 수 있는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방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문으로 한 걸음씩 내디디고 있는 사람도, 백스텝으로 인해 문을 열고 나왔다 다시 들어간 사람도, 저 작품 속 주인공처럼 완전히 그 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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